최만리 언문 창제 반대 상소문 요약
세종 26년 갑자 2월 20일(경자)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들이 언문 제작함을 업드려 뵈옵건데 대단히 신묘하여 사리를 밝히고 지혜를 나타냄이 저 멀리 아득한 예로부터 나온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신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아직도 의심할만한 점이 있사옵니다. 감히 근심되는 바를 나타내어 다음과 같이 삼가 상소하오니 재결하여 주시옵소서.
1. 우리나라는 조정 이래로 지성껏 중국문화를 섬기어, 오로지 중국제도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중국과 문물제도가 같아지려고 하는 때를 맞이하여, 언문을 창제하시면 이를 보고 듣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상히 여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혹시 대답으로 말씀하시기를,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 새 글자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고전 글자와 유사합니다만, 소리로서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어긋나는 것이며, 실로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하오니, 혹시 언문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서 이를 그르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면, 중국문화를 섬김에 있어 어찌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1. 옛부터 9개 지역으로 나누인 중국 안에서 기후나 지리가 비록 다르더라도 아직 방언으로 인해서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고,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과 같은 무리들만이 각각 제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오랑캐들만의 일이라 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전해오는 고전에 의하면, 중국(夏)의 영향을 입어서 오랑캐(夷)가 변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오랑캐의 영향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었습니다. 역대 중국이 모두 우리나라가 기자의 유풍을 지니고 있고, 문물제도가 중국과 견줄만 하다고 했는데, 이제 따로이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진다면 이것이 이른바 소합향을 버리고 쇠똥구리의 환약을 취하는 것이니, 어찌 문명의 큰 해가 아니겠습니까?
1. 신라 때 설총이 만든 이두가 비록 거칠고 촌스러우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사로 쓰기 때문에 한자와 애당초부터 아무상관이 없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비록 서리나 하인들의 무리까지도 꼭 이를 익히려고만 한다면 먼저 한문책 몇 권을 읽어서 약간 한자를 안 다음에 곧 이두를 쓰니,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한자를 의지해야만 뜻을 달할 수 있으므로, 이두로 인해서 한자를 아는 사람이 자못 많아, 역시 학문을 진흥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만일에 우리나라가 원래 우리글자를 몰라서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쓰는 시대 같다면 아직 언문을 빌어서, 잠시의 변통으로 삼는 것은 오히려 옳습니다만, 옳은 의견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저 언문을 써서 잠시 변통하기보다는 차라리 천천히 저 중국에서 통행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겠거늘, 하물며 이두는 수 천년동안 써 오면서, 관청의 문서기록과 약속, 계약 등으로 쓰이어서 아무 탈이 없는 것이어늘, 어째서 옛부터 써온 폐단이 없는 글자를 고쳐서 따로이 속되고 이로움이 없는 글자를 만드시나이까? 만일에 언문이 통용되면 관리가 될 사람이 오로지 언문만 배우고 학문을 돌보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한자와 관리가 갈리어 둘이 될 것이며, 진실로 관리된 자들이 언문으로서만 모든 일을 하고 또 벼슬길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뒷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이 됨을 보고 27자 언문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입신하기에 족하다고 할 것이오매, 무엇 때문에 모름지기 고심하고 마음을 써서 성리의 학문을 닦겠나이까? 이렇게 나가면 수십 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반드시 적어질 것이오매, 비록 언문으로서 관공서 일을 수행할 수 있더라도 성현의 한자를 알지 못하면 배우지 않아 담에 얼굴을 댄 것 같아서, 사리의 시비를 가리기에 어둡고 다만 언문에만 공을 들일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쓰겠나이까?
우리나라가 덕을 쌓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문을 숭상해 온 교화가 점점 깨끗이 없어져 버릴지 두렵삽나이다. 이보다 앞서 쓰이어 온 이두가 비록 한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데도, 유식자들은 아직도 이를 천한 것으로 쳐서 이문(吏文)으로써 이를 바꾸려 하고 있는데,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 조금도 연관이 없는 것이며 오로지 시장거리의 속된 말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에 언문이 전조부터 있어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문명의 정치와 노를 변해 도에 이르러 일신하는 때에, 아직도 언문 같은 좋지 않은 습관을 이어 받아야 하나이까, 하고 반드시 이를 바로잡겠다고 논의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는 뚜렷이 알 수 있는 이치이옵나이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폐단이니, 이제 이 언문이 다만 하나의 신기할 재주일 뿐이오며, 학문을 위해서도 손해가 되고, 정치에 있어서도 이로움이 없으니,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 이로움을 알 수 없사옵니다.
1. 만일에 형을 집행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말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차이로 혹시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있으나 이제 언문으로 죄인의 말을 바로 써서 읽어 주고 듣게 한다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중국은 옛부터 언어와 글자가 같은데도, 죄인을 다스리고 소송 사건에 원통한 일이 매우 많고, 만일에 우리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옥에 갇힌 죄인 가운데 이두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자기가 공술한 내용을 직접 읽어보고, 그 내용에 사실과 다른 점을 발견하더라도, 매를 이기지 못하여 억울하게 승복하는 일이 많으니 이로 보아 공술한 글의 뜻을 몰라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 합니다. 만일에 그러하다면, 비록 언문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와 무엇이 다르옵니까? 이로써 죄인을 공정하게 또는 공정치 않게 다스리는 일이 옥리(獄吏)의 자질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지, 말과 글이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거나 하는데 달려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언문을 가지고 죄인을 공정하게 다루려고 하신다면, 신들로서는 그 타당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1. 무릇 일을 이루어 공을 세움에 있어서, 가깝게 속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에서 요 근래 하는 일이 모두 속성으로 힘쓰고 있사오니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혹시 언문을 부득이 창제하셔야 될 일 이라면, 이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이오니,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하급관리와 백성에 이르기까지 상의하여야 하고, 설혹 모두 옳다고 하여도 오히려 사전에 정령스럽게 하여 사전에 변경을 도모하여 다시금 심사숙고하여, 역대 제왕에게 질문하여도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과 상고하여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에 성인이 나타나셔도 의심스러움 바가 없는 연후에야 곧 실행에 옮길 일이옵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널리 여론을 들어보지 않고 갑자기 하급관리 십여 인으로 하여금 배우게 하며, 또 가벼이 옛사람이 이미 미루어 놓은 문서를 고쳐서 황당한 언문을 붙이고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서 이를 새기어, 급히 널리 세상에 공표하려 하고 있사오니, 이 일에 대한 온 천하와 후세사람들의 공론이 어떠하오리까?
또 이번의 청주 초수(椒水) 행차에 있어서는, 특별히 흉년을 염려하시와 호종 의식도 간략하게 하도록 힘쓰시어 그전에 비하여 10중 8·9로 줄이시고, 상감께 상주(上奏)할 공무도 대신들에게 위임하고 계시온데, 저 언문은 국가적인 급한 돌발사건이어서 기일 내에 꼭 이룩해야 될 일이 아니온데도, 어째서 유독 행재(行在)에서까지 이 일에 관한 일을 급히 서두르시어, 상감님 옥체를 조섭해야 할 시기에 괴롭히나이까? 신들로서는 그 타당함을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1. 옛 유학자가 말하기를, 모든 신기하고 보기 좋은 일들이, 모두 성현의 학문을 공부하는 뜻을 빼앗는다고 하고, 편지 쓰기는 유학자에게 가장 가까운 일이나 오로지 그 일에 사로잡히면 역시 스스로 뜻을 잃게 된다고 하였사온데, 이제 동궁이 비록 덕성이 함양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마땅히 성학(聖學)공부에 깊이 마음을 써, 그 모자라는 점을 더욱 닦아야 하옵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다만 선비의 육예의 하나일 뿐이오며, 하물며 도를 닦는 데에는 참으로 이(利)가 없는 것이온데, 무엇 때문에 이일에 정신을 쓰고 마음을 쓰며, 날을 마치고 시간을 보낸다면 실로 현 시점에서 시급한 학문을 닦는데 손해가 되나이다.
신들은 모두 보잘것 없는 글재주를 가지고 상감님을 뫼시고 있는 죄가 크온데, 마음에 품은 바를 감히 담고있을 수가 없어서, 삼가 가슴에 있는 말씀을 다 사뢰어 상감님의 어지심을 흐리게 하였나이다.
세종대왕의 반박문(1444. 2 / 세종실록 26년)
그대들이 말하기를 음을 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을 달리한 것이 아니냐? 또 이두를 만든 근본 취지가 곧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언문도 역시 백성을 편안케 함이 아니냐? 그대들이 설총이 한 일은 옳다고 하고, 그대들의 임금이 한 일은 옳지 안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또 그대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또 상소문에서 말하기를 새롭고 신기한 하나의 재주라 하였는데, 내가 늘그막에 소일하기가 어려워 책으로 벗삼고 있을 뿐이지,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이 일을 하고 있겠느냐? 그리고 사냥하는 일들과는 다를 터인데, 그대들의 말은, 자못 지나친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다. 또 내가 나이 들어 국가의 서무는 세자가 도맡아서, 비록 작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의당 마땅히 참여하여 결정하고 있는데, 하물며 언문은 말하여 무엇하겠느냐! 만일에 세자로 하여금 늘 동궁에만 있도록 한다면 환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해야겠느냐! 그대들은 나를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들로서, 내 뜻을 분명히 알고 있을 터인데도 이런 말을 하니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원문과 해석
庚子. 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 上疏曰.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創物運智. 형出千古.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有駭觀聽. 黨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未聞於夷者也. 歷代中國. 皆以我國. 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당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一. 新羅薛聰吏讀. 雖爲鄙俚. 然皆借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 故雖至胥吏僕隷之徒. 必欲習之. 先讀數書. 粗知文字. 然後乃用吏讀. 用吏讀者. 須憑文字. 乃能達意. 故因吏讀而知文字者頗多. 亦興學之一助也. 若我國元不知文字. 如結繩之世. 則姑借諺文. 以資一時之用猶可. 而執正議者. 必曰與其行諺文以姑息 不若寧遲緩而習中國通行之文字. 以爲久長之計也. 而況吏讀行之數千年. 而簿書期會等事. 無有防礎者. 何用改舊行無弊之文. 別創鄙諺無益之字乎. 若行諺文則爲吏者. 專習諺文. 不顧學問. 文字吏員岐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其如此也. 以爲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 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我國積累右文之化. 恐漸至掃地矣. 前此吏讀. 雖不外於文字. 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而況諺文與文字. 暫不干涉. 專用委巷俚語者乎. 借使諺文. 自前朝有之.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 厭舊喜新. 古今通患. 今此諺文. 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洽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
一. 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寃. 今以諺文. 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 而無抱屈者. 然. 自古中國. 言與文同. 獄訟之間. 寃枉甚多.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 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寃也. 明矣. 若然則雖用諺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平獄辭. 臣等未見其可也.
一. 凡立事功. 不貴近速. 國家比來措置. 皆務速成. 恐非爲治之體. 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下至百僚. 國人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 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 後世公議何如. 且今淸州椒水之幸. 特慮年겸.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 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 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 尤未見其可也.
一. 先儒云. 凡百琓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著. 亦自喪志. 今東宮. 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臣等. 俱以文墨末技. 待罪侍從. 心有所懷. 不敢含默. 謹경肺腑. 仰瀆聖聰.
上覽疏. 謂萬理等曰.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薛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汝等. 以薛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且疏云. 新奇一藝. 予老來難以消日. 以書籍爲友耳. 豈厭舊好新而爲之. 且非田獵放鷹之例也. 汝等之言. 頗有過越. 且予年老. 國家庶務. 世子專掌. 雖細事. 固當參決. 諺文乎. 若使世子. 常吊宮. 則宦官任事乎. 汝等以侍從之臣. 灼知予意. 而有是言可乎.
萬理等對曰. 薛聰吏讀. 雖曰異音. 然依音依釋. 語助文字元不相離. 今此諺文. 合諸字而 書. 變其音釋. 而非字形也. 且新奇一藝云者. 特因文勢而爲此辭耳. 非有意而然也. 東宮於公事. 則雖細事. 不可不參決. 若於不急之事. 何竟日致慮乎.
上曰. 前此金汶啓曰. 制作諺文. 未爲不可. 今反以爲不可. 又鄭昌孫曰. 頒布三綱行實之後. 未見有忠臣孝子烈女輩出. 人之行不行. 只在人之資質如何耳. 何必以諺文譯之而後. 人皆效之. 此等之言豈儒者識理之言乎. 甚無用之俗儒也. 前此. 上敎昌孫曰. 予若以諺文. 譯三綱行實.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昌孫乃以此啓達. 故今有是敎.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辭以對.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學崔萬理. 直提學辛碩祖. 直殿金汶. 應敎鄭昌孫. 副校理河緯地. 副修撰宋處儉. 著作郎趙瑾于義禁府. 翌日命釋之. 唯罷昌孫職. 仍傳旨義禁府. 金汶前後變辭啓達事由. 其鞫以聞. (辛丑. 義禁府劾啓. 金汶律該對制上書. 詐不以實. 杖一百徒三年. 只贖杖一百)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一.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一.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당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一.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 나 복예(僕隸)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防碍)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베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 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 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변로지도(變魯至道)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一.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刑殺)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寃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招辭)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一.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후경(後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소(疏)를 보고, 만리(萬理)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늙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니, 만리(萬理)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문세(文勢)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參決)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